948년 8월 16일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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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6일 일기다.
"작년과 금년의 보리농사 흉년, 공출의 가혹, 이로 말미암아 유월부터 굶기가 일쑤, 아아 할 수 없다.
장리(長利)나 얻어 임시 지내자.
즉 지금 보리 한 가마 얻어다 먹고 가을에 쌀 한 가마 주는 것이다.
또 지금 2000원 차금하고 가을에.
바닥나 열흘 동안 굶은 여병기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두 달만 있으면 햅쌀이 나오지만 결국 마을 지주에게 '장리(長利)' 쌀을 빌리기로 했다.
장리쌀은 보통 이자가 5할(50%)이었다.
즉 봄에 5말을 빌리면 가을에 7말 반을 갚아야 했다.
放債) 흥리(興利) 식리(殖利) 등이 있으나 식리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대출이자를 ‘이식(利息)’이라 하고, 50%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
대출사업자의 공사(公私)에 따라 공채(公債)와 사채(私債)로 구분했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를 ‘흥리인.
벼꽃을 볼 때만은 배가 불렀다.
가을 황금들판을 보고도 부르지 않던 배였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먹고 가을에 햅쌀로 갚는장리(長利)는 꾼 곡식에 절반이나 되는 이자를 얹어 주어야 했다.
색갈이를 하는 부잣집들이 고리대금업자였다.
승정원 일기에는 내의원이 대변 색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해 모양과 느낌까지 일일이 기록했다.
‘대변장리(長利)’라는 표현은 임금의 대변이 길고 장이 편하게 보였다는 뜻으로 왕의 배설은 ‘방하(放下)’라고 했다.
농가의 비율은 91%나 됐다.
부채는 연리 60% 이상의 고리대였다.
농촌사회가 자급적 생존경제로 후퇴하면서 일정기에 사라진장리(長利)가 부활했다.
1950년대 한국은 17세기 이래 소농사회의 마지막 자락에 해당했다.
도시의 경제와 문화도 소농.
연 50%에 이르러 살인적이었다.
채무자 보호 장치에 대응하여 대부업자들이 고금리로 자구책을 세운 것이다.
역대 왕들은장리(長利) 즉, 지나친 고금리를 색출하여 곤장을 치는 시범을 보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대한제국은 법정 최고 금리를 연 40%로 낮추는 선.
이른 아침에 마부와 말을 가은리(可隱里: 加恩)로 보냈는데, 김지원(金至元)․ 신응개(申應漑) 집에서장리(長利)를 놓으며 곡식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5월 18일] 관청의 진휼이 원활하지 않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식량을 구하려면 사적인 방법이나.
삼국시대 '장리(長利)'는 곡식을 춘궁기에 빌려주고 추수철에 받아낸다.
화폐 대신 곡식을 꿔주고 받은 대부업의 시초인 셈이다.
당시장리금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연 66%쯤 된다.
고려 경종(980년) 땐 이를 절반인 33%로 제한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고리대금업이.
흐르면서 왕족과 세도가들의 토지겸병 현상이 심화된다.
수조권을 기반한 토지지배구조가 약화되거나 붕괴되고 매득(買得),장리(長利,) 개간(開墾) 등 통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대되면서 농지를 떠나는 유민(流民)들이 대거 발생하고, 일부 양반들이 사노(私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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